이번 포스트에서는 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흔히 ‘귓밥’이라고도 불리는 귀지(이구, 耳垢)는 알고 보면 우리 귀의 건강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괜찮은 친구이지만, 우리에게는 사실 ‘지저분하다’라는 이미지가 더 강합니다.
게다가 이미 귀지가 우리 귀에서 좋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분들도 많지만, 그런 분들도 귀지를 파내는 것이 시원하고, 또 그래야만 깔끔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기어코 귀지를 귀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래저래 핍박을 받고 있는 귀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서, 귀지가 살고 있는 외이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외이도는 귓구멍 입구로부터 제일 안쪽의 고막까지 이르는 터널 같은 구조입니다.
외이도는 말랑말랑한 연골 벽으로 이루어진 연골부와 딱딱한 뼈벽으로 이루어진 골부로 나누어지는데요. 이때 외이도의 바깥쪽 1/3가 연골부이고, 안쪽 2/3이 골부입니다. 연골부는 피부 아래 다른 몇 층의 구조가 있는 반면, 골부는 피부 아래에 바로 뼈가 있고, 피부가 매우 얇기 때문에 자극이 주어지면 매우 아프죠.
여기서 귀지가 생기는 곳은 바로 바깥쪽 연골부입니다. 연골부 외이도의 피부에는 피지선, 이구선이라는 분비선이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분비물들과 죽은 외이도 피부의 각질, 피부에 살고 있는 균 등이 뭉쳐진 것이 귀지가 되는 것이죠.
1. 귀지는 정말 지저분한 것인가?
귀지가 우리 외이도 속에서 살면서 하는 일은 크게 말씀드리자면 연약한 외이도 피부에 대한 방어 작용이라고 알아 두시면 됩니다. 일단 귀지는 지방 성분이 많기 때문에(귀지를 영어로는 ear wax라고 하는 이유지요) 물기가 귀에 잘 스며들지 못하게 하고, 약한 산성을 띄고 있어 병원균들이 외이도에서 잘 증식할 수 없도록 막아줍니다. 게다가 리소좀(lysosome)이라는 항균 물질을 가지고 있어 자체적으로 균을 죽이기도 하죠. 자체 항균 기능까지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이런 귀지들을 지저분해 보인다는 이유로 귀이개로 마구 파내어 버리면 당연히 외이도가 약해져서 외이도염이 걸리기 쉽게 됩니다. 게다가 귀안을 보면서 파내는 것이 아니라 외이도의 촉각을 이용해서 귀지를 파내기 때문에 당연히 외이도 정상 피부층에 손상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감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외이도염으로 병원에 1-2주일씩 다니시며 고생하는 분들을 보면 습관적으로 귀이개를 사용하셨던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2. 귀지를 규칙적으로 파지 않으면?
이쯤 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지를 그냥 놔두면 결국 귀지가 쌓여서 결국 외이도가 막혀버리지 않겠느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 같네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이도의 피부는 안 쪽에서 바깥쪽으로 귀지나 다른 이물질을 귀 바깥으로 밀어내는 자체 정화 작용(epithelial migration)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가끔 자신의 귀지가 저절로 귀 바깥으로 나와있거나, 어깨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자체 정화 작용을 통해 대부분의 귀지들은 눈에 보일 정도로 커지기 전에 우리 외이도를 떠나 바깥세상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따라서 특별한 증상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억지로 귀지를 제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3. 귀지가 꽉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면 귀지 때문에 귀가 막혀서 병원에 가서 파내고 왔다는 분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또 의문을 가지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귀지가 귀를 막아서 가려움, 난청, 심한 경우 통증이나 어지러움 등을 호소하게 되는 경우를 이구전색(耳垢栓塞, cerumen impaction)이라고 합니다. 귀지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외이도 많이 쌓여 귀를 막아버린 상태를 한자어로 짧게 쓴 병명입니다.
이구전색이 발생하는 이유는 외이도염, 습진 등으로 피부의 정화 기능이 떨어지거나, 골종, 종양 등으로 외이도 자체가 좁아지는 경우, 또 선천적으로 외이도가 좁거나, 귀털이 과하게 긴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선천적으로 귀지가 많이 생기는 분들도 이구전색이 발생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원인들보다 더 큰 이유는 노화에 의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외이도의 피지선, 이구선도 늙어서 이전과는 달리 딱딱하고 건조한 귀지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되면 쉽게 피부가 귀지를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외이도 피부 정화 기능 자체도 약해져서 더욱더 이구전색이 발생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어린 소아도 아직 발달이 완전하지 않아 성인보다 이구전색이 자주 발병하게 됩니다.
이런 이구전색을 치료하는 방법은 미네랄 오일이나, 과산화수소액 같은 이구용해제를 이용하거나, 외이도를 생리식염수로 청소해주는 방법이 있지만, 이는 협조가 잘 되지 않는 소아나 외이도에 기구를 사용하였을 때 심하게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경우에 사용하게 됩니다. 또 오래 사용했을 때는 오히려 외이도염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1주일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추천되는 방법은 의사가 기구로 제거해주는 것입니다. 숙련된 기술을 가진 전문가가 내시경으로 외이도 안을 보면서 미세한 도구를 사용하여 직접 귀지를 빼내는 것이지요. 이는 외이도의 정상적인 환경을 손상하지 않고, 빠른 귀지의 제거가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방법보다 더 추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구전색이 자주 발생하는 분들은 정기적으로 1-2달에 한 번씩 이비인후과에 가서 귀를 진찰받는 것도 예방을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이 쌓이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귀를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귀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억지로 파낼 필요 없다는 것 명심하세요.